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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의자왕의 '올바른 선택' ... 집착은 리더를 어떻게 근시안으로 만들었나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920년 중국 뤄양시 주택개발지역 철거물에서 글이 새겨진 돌 하나가 발견됐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묘지명이었다. 의자왕과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당나라군에 의해 당나라로 압송됐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얼마동안 생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에 따라 그 역시 부여융 근처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당나라에서 보낸 생의 남은 기간, 의자왕은 자신의 잘못을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물론 백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당나라 침공이었다. 그러나 과거 외환위기나 요즘의 금융위기처럼 외부적 요인이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위기 대처라는 측면에서 보면 누구나 반성할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백제 멸망은 정말 의자왕의 '방탕함' 때문이었나?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가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의자왕은 세자 시절에 형제들과 화목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서 ‘해동증자’로 불렸다. 또 결단력이 있고 과감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신라에 대규모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한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성충 표준 영정 (출처 전통문화포털) / 삼국사기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그러나 이 무렵부터 의자왕은 교만해져서 방탕과 사치에 빠지고 충신과 충언을 멀리한다. 의자왕 15년, 의자왕은 궁을 화려하게 리모델링하고 음란하며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이듬해 좌평 성충이 극렬하게 이를 말리자 화가 난 의자왕은 성충을 투옥하고 당나라 침공을 경계하라는 성충의 상소를 무시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해동증자라고까지 불리던 인물이 그렇게 쉽게 타락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의자왕의 사생활이 좀 문란해졌다고 하지만 그것이 백제가 망할 정도의 폭정은 아니었다. 
  
무엇이 진실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은 의자왕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보도일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다만 삼국사기는 유가 관점에서 쓴 역사책이어서 사건의 배경이나 사회적·환경적 요소는 제거하고 지도자의 성품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알맹이가 빠지고 타이틀만 남은 기사가 된 것이다. 
660년(의자왕 20)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한 진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기 641년 의자왕이 즉위할 당시 백제와 신라는 운명적 결전이라고 할 만큼 사생결단의 공방전을 벌였다. 한반도 통일에 가장 근접한 나라는 고구려지만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남하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하고 있었다. 성왕 때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면서 신라가 기습적으로 한성을 점거했다. 
  
이 사건으로 한반도 내 힘의 균형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백제는 자신들의 옛 수도인 한성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최대 규모의 전투를 준비하던 성왕은 어이없게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살해됐다.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도 신라를 계속 밀어 붙였지만 결정적인 고비를 넘지 못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빠르게 성장했다. 시간은 안타깝게 흘러갔지만 백제는 쉽게 역전의 계기를 잡지 못했다. 한강 쟁탈전에서 신라는 전술적 우위에 있었다. 한강의 지류인 남한강은 신라 영역인 충주·단양 지역으로 뻗어 있다. 신라는 수로를 이용해 빠르고 쉽게 병력과 물자를 이송할 수 있었지만 백제는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이것은 전술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건국세력과 토착세력의 엇갈린 이해관계... 둘로 나뉜 백제


더욱 치명적인 약점은 백제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성탈환전에 대해 백제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것이다. 백제의 왕족과 건국세력들은 만주의 부여와 고구려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었다. 그들은 한강 유역의 세력과 연합해 백제를 세웠다. 그런데 한성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이들은 다시 웅진(공주)으로 이주했다. 수도를 옮겼으니 집권세력에도 변화가 일어나 웅진 주변 세력들이 권력 중추로 들어왔다. 

백제가 한성 탈환전을 시도하려 하자 이들의 분열이 가시화됐다. 귀족세력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체로 충청도 주변과 그 남부 귀족들이 한성탈환전에 미온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 보는 장사였다. 한성 탈환에 성공하면 수도는 다시 한성으로 옮겨갈 것이고, 왕족과 과거의 집권 귀족세력들은 자신의 영토와 권력까지 회복할 것이다. 자신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수도권의 특권마저 상실할 것이 분명했다. 왕들은 지역 이권만 보지 말고 국가라는 전체를 보라고, 이 상태를 방치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설득했겠지만 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오승우 - 황산싸움 (출처 국가기록원)
백제 정치사의 이 고질병에 대해 의자왕은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는 인물평 그대로 획기적인 방법을 썼다. 의자왕 16년 왕은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대신급인 좌평을 모두 아들과 왕족들로 대체한다. 왕의 아들만 41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했다. 의자왕이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었다는 인물평은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이다. 의자왕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형제들과 우애가 깊었다는 기사도 이 사건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세자 시절부터 왕실의 정치적 단합을 추구했으며, 자식도 많이 생산해야 했다. 그래서 궁도 크게 짓고 잔치를 벌였다. 
  
성충이 문제의 상소를 올리고 투옥된 것도 바로 이 해의 일이다. 그가 올린 상소의 본래 목적은 왕족의 과도한 권력 장악과 숙청에 대한 반대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좀 더 솔직하게 의자왕과 왕비가 귀족을 많이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사실을 조합하면 해동증자설과 폭군설이 서로 모순적인 것도 아니고, 의자왕이 만년에 변절한 것도 아니었다. 왕실 입장에서 보면 그는 여전히 해동증자였다. 왕실의 정치적 단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족층 입장에서 보면 의자왕은 전제권력을 추구하며, 충신을 몰아내고 충언을 멀리하는 전형적인 폭군이었다. 



문제에만 집착하는 근시안이 파국 원인

그렇다면 백제 멸망에 대해 의자왕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는 형편없는 폭군이 아니다. 그렇다고 백제 멸망에 대한 그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다. 의자왕의 실수는 문제에만 집착하다 보니 그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해법의 전부라고 판단한 데 있다.

국가 지도자 입장에서 보면 귀족들의 근시안과 이기주의는 정말 화나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힘을 모으는 것이었다. 의자왕은 과감하게 결단해 그들을 제거했다. 보기 싫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왕실의 권력이 증가한 것 같지만 국가는 분열되고 힘도 흩어졌다. 그의 결정이 백제 사회의 깊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당나라 군대 (출처 영화 안시성 - 네이버 영화)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오판이 당나라 침공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성충은 죽기 전에 당나라 침공을 경고하는 상소를 의자왕에게 올렸지만 의자왕은 듣지 않았다. 당나라 침공을 예상하고 총력전을 준비하려면 그의 숙원사업인 귀족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거나 완화해야 했다. 그래서 의자왕은 전쟁에 대한 경고에 대해 숙청을 면해 보려는 귀족세력의 음모 내지는 위기설 조장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의자왕뿐 아니라 역사상의 수많은 군주와 리더의 삶을 집어 삼킨 함정이다. 특히 불리하고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 특정 사건으로 오래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자주 빠진다. 자신의 삶을 괴롭히고 운명을 왜곡하는 원인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에 ‘그들(또는 그것)만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을 갖기 일쑤다. 그러나 ‘그들’만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역사를 바꾼 현명한 리더는 때로 ‘그들’을 적극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한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25호
필자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인터비즈 오종택, 임현석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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