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최강 미군이 북한군에 고전했던 까닭은 올바른 \

최강 미군이 북한군에 고전했던 까닭은 올바른 '리더' 부재 탓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950년 8월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숨 가쁜 순간이었다. 북한군은 전쟁 발발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한반도 석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미군의 빠른 참전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는 했지만, 북한군은 2차 세계대전(1939~1945) 최대 승전국이며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마저도 거세게 밀어붙여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단 한 번의 일격만 남은 상황이었다. 북한은 마지막 공세를 위해 후방에 남겨뒀던 인민군 13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했다.

한편 낙동강 이남 한국 국군과 미군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국군의 입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미 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1950)는 어쩌면 자신이 미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전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전차 군단' 패튼 휘하에서 빛나는 전공을 쌓았던 그가 눈 깜빡할 사이에 몰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있는, 거의 듣도 보도 못한 작은 나라에서 미군 2개 사단이 순식간에 유린당하는 셈이었다.
4성 장군까지 올랐던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 1950년 12월 23일 서울 도봉구 지역에서 무기를 옮기던 미군 지프차에 치여 사망했다 / 출처: 위키피디아
거의 모든 면에서 북한군보다 못했던 초창기 미군

중과부적이니 뭐니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 미군은 모든 면에서 완패였다. 전술 능력, 병사들의 역량, 투지, 심지어는 무기의 성능까지도 전폭적인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미군보다 뛰어났다. 본격 남침을 앞두고 수 년간 한국전쟁을 준비한 북한군은 상당히 잘 훈련돼 있었다. 주력 장병들은 중일전쟁(1937~1945)에도 참전했던 베테랑들이었다. 당시 중국군에 가담해서 싸웠던 그들 대다수가 그대로 북한군에 편입돼 전쟁을 준비했다.

미군은 달랐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요소요소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체계적으로 배치돼 있지는 않았다. 장교단은 더욱 심각했다. 사단장 이하 지휘관 대부분이 전투부대 출신이 아닌 행정직이나 참모 출신들로 구성됐다. 전투의 기본도 모르던 장교들도 있었다. 6.25에 참전했던 당시 한국 장교들의 회고담들을 읽어보면 “미군들은 오직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도로 옆에서 쉬고, 도로가 없는 곳이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를 곧잘 확인할 수 있다.
6.25 참전 결정 이후 1950년 7월 1일 부산항에 처음 도착한 미군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물론 모든 미군이 그러지는 않았다. 몇몇 노련한 지휘관들은 도로 가에 본부를 차리는 바보 같은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지휘관 대다수는 이런 엉터리들이었다. 산 사면의 엄폐 가능한 곳에 본부를 차리라고 가르쳐 줘도 콧방귀를 뀌었다.

군의 훈련 상태도 형편없었다. 한국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탓인지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들은 마치 휴가라도 받은 양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은 1949년이 되어서야 워커의 지시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대대급 이상의 전술훈련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자국에서 미군의 기동훈련이 벌어지는 일을 용납하지 않아서, 그만한 장소를 절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 북한군 덕분에...


미군이 북한군보다 우세한 부분은 보급물자 물량과 공군력이었지만, 그마저도 상황을 역전시키기에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은 미군이 계속 조금씩 보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7월 중순 2보병사단 선발대가 도착했고, 8월 19일에는 마지막 38연대가 도착했다. 무엇보다 해병여단의 도착은 가장 반가웠다. 그들은 낙동강 이남에서 대대급 이상 전술기동과 공군과 육군의 협동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였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미 육군 24사단 소속 M24 채피 전차와 전차병들(1950년 8월 17일) / 출처: 위키피디아
낙동강 전선에 집결한 병력은 북한군이 7만 명이었고 미군과 한국군은 9만 2000 명이었다. 그럼에도 전투는 줄곧 북한군이 우세했다. 

사실 북한군은 이미 여러 번 전쟁을 끝낼 기회가 있었다. 만일 북한군이 8월 이전에 집중적인 돌파 혹은 다중 돌파를 시도했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절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미군은 활용 가능한 예비대조차 거의 없었다. 8월 내내 워커는 적의 공격 지점을 예측하고 유일한 예비대를 그곳으로 파견해 충원하거나, 윗돌 빼서 아랫돌 막는 식으로 병력을 운용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런 기회들을 포착하지 못했다. 일단 낙동강 전선의 교착상태부터가 사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였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에 맞닥뜨리자, 전 전선에 걸쳐 병력을 고르게 분산시키기만 하고 집중 돌파는 시도하지 않았다. 북한군은 전반적으로 우수한 전술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사단급 이상에서 협력 작전이 전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서로 간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이상한 분업 정신을 보여주었다.

북한군이 결단을 하지 못한 데에는 트럭과 도강장비 부족, 그리고 미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과 이동에 제약을 받았던 탓도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위와 같은 북한군의 통합 지휘 능력 부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워커의 부대 배치 실수... 전쟁이 끝날 뻔한 위기 만들다

줄곧 밀리는 와중에도 워커는 최선을 다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한 번의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새롭게 도착한 2사단을 낙동강 돌출부에 배치한 것이다. 

당시 2사단의 훈련 상태는 엉망이었다. 각 제대의 병력도 기준에 못 미쳤다. 무엇보다 사단장이 가장 못 미더웠다. 55세의 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해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한 번도 전투병과에 근무하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도 본국에서 보냈다. 그런 그가 사단장이 된 것은 참모총장이 그의 동기였던 덕분이었다. 그 휘하 연대장 3명은 아예 전투 경험이 없었다. 따라서 워커는 2사단을 가장 안전한 장소, 더 정확하게는 그가 판단하기에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장소에 배치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낙동강 돌출부, 대구 서쪽 현풍에서 창녕과 영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9월 1일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방어선 여기저기서 위험한 곳이 생겼다. 이때 돌출부의 2사단이 공략당하고 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워커에게 날아왔다. 안전하다고 믿었기에 그곳으로 보낼 예비대가 없었다. 영산이 무너지면 밀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국도가 열리고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다.
연합군과 북한군 간 전투가 끝나고 폐허가 된 서울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워커는 당장 비행기를 타고 2사단 본부로 쳐들어 갔다. 현지에 도착해 본부 상황판을 보니 기가 막혔다. 2사단은 정찰, 경계, 배치에 모두 실패했다. 부대는 너무 넓게 배치돼 있고 곳곳에 간격이 있었다. 그리고 상황판의 배치와 실제 위치가 맞지도 않았다. 사단장과 연대장은 모두 예하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교범상 1개 중대의 담당구역은 1km였는데, 이날 밤 최전방에 있던 23연대 1대대 찰리 중대의 담당구역은 무려 14km에 달했다. 중대 인원은 200 명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북한군은 노무자로 위장해 후방과 미군부대에 쉽게 침투했기 때문에 이 간격과 중대, 대대본부의 위치를 훤하게 알고 있었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1만의 병력이 몰아쳐 찰리 중대본부를 쓸고 나갔다.

2사단 본부를 나온 워커는 비행기 안에서 갈 곳조차 정하지 못했다. 순간 워커는 2사단이 전멸하고 부산이 함락돼 8군이 완전히 고립, 붕괴되는 상황을 그렸던 것 같다. 비행기가 상공을 헤매는 동안, 2차 세계 대전 당시 ‘리틀 패튼’이라고 불렸던 워커는 울고 있었다고 한다.


기적이 일어나다! 영산을 지켜낸 미군 2사단 9연대

그러나 이후 3일 동안 기적이 일어났다. 뚫릴 것이라 예상했던 요충 몇 곳이 성공적으로 북한군을 방어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산이었다. 카이저를 만났을 때 워커는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영산에 투입하라고 다그쳤다. 카이저는 워커의 말대로 공병 대대까지 모두 전투 부대로 재편해 영산을 지키는 9연대로 보냈다. 

그런데 사실 카이저는 이 과정에서도 또 한 번 큰 실수를 할 뻔했다. 그 중요한 9연대 연대장을 힐 대령에게 맡긴 것이다. 힐 대령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전쟁 초짜였다. 때문에 초반 몇 번의 전투에서 9연대는 몇 번이나 잘못된 작전으로 참패를 경험했다. 9연대가 성공적으로 북한군 진격을 저지해낸 까닭은 연대장이 아닌, 그 아래 노련한 중대장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비힐러 중위다.

비힐러는 공병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다. 뛰어난 장교였던 그는 9연대에 오자마자 힐 대령과 마찰을 겪었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공을 세울 욕심은 있었던 힐은 여러 가지 잘못된 작전으로 부대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그중 하나가 선제공격으로 적의 기선을 제압한다는 작전이었다. 명백한 오판이었다. 오판은 재앙으로 돌아왔다. 선제공격을 하려면 강을 건너 적을 공격해야 하는데, 적은 이미 강둑 뒤 유리한 지역을 단단히 점거하고 있을 게 뻔했다. 게다가 9연대는 도하장비도 없고 도하훈련을 받은 병사도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도하작전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비힐러는 무모한 짓이라고 반대했으나 힐 대령은 듣지 않았다. 9연대는 무리한 선제공격을 감행했고, 당연하게도 역공을 받아 참패했다. 영산을 지키는 일은 더욱 버겁게 됐다.
전투를 진행중인 국군과 연합군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수차례 작전 실패 이후 힐은 곧바로 해임되긴 했다. 영산 방어라는 막중한 임무는 온전히 비힐러가 담당하게 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힐을 해임한 부사단장은 비힐러가 공병장교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해임한 힐 대령을 고문 형식으로 돌려보내 비힐러 중대를 지원하게 했다.

공식적으로 부대 지휘권은 비힐러에게 있었지만 힐은 대령이었다. 힐은 여전히 중대에 명령권을 행사했다. 그는 비힐러에게 영산 마을 앞 들판에 참호를 파고 일자형 방어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비힐러는 기겁을 했다. 허허벌판에 일자 진지라니, 이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평원과 달리 한국 지형은 눈만 돌리면 산과 구릉이 있다. 비힐러는 방어진지로 적당한 언덕에 진지를 설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지켜야 할 곳은 영산 마을이 아니라 영산에서 밀양으로 가는 도로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며 힐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더욱이 그가 찾은 언덕은 도로를 감지하는 최적의 장소였다. 

비힐러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힐은 마지못해 “북한군의 공격이 너무 강력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언덕으로 이동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 말을 들은 비힐러는 휘하 상사를 불러 방금 적의 공격이 시작됐으니 즉시 중대를 이끌고 언덕 위로 올라가 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힐 대령은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밤, 2개 대대가 비힐러의 중대를 공격했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던 비힐러 중대는 이틀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영산을 사수했다. 무너질 것이라 예측되던 낙동강 방어선이 지켜지는 순간이었다.
유엔군 9연대 소속 M26 전차가 낙동강을 건너고 있는 적군을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준비되지 않은 리더는 조직과 구성원,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불행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훈련되지 않은 군대와 준비되지 않은 리더, 훈련된 군대와 경험 있는 리더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를 보여준다. 또 '미군'처럼 세계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조직 역시 자만에 빠져 자기 검증 능력을 상실하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

준비되지 않은 리더가 책임자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조직과 구성원의 불행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리더 본인에게도 커다란 비극이 된다. 일례로 낙동강 전투에서 2사단은 커다란 피해를 봤지만 카이저는 해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카이저 장군 개인에게도 큰 불행이 됐다.

1950년 11월에 2사단은 적유령에서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3000명 이상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본다. 한국전 사상 미군이 입은 최대 규모 패전이다. 이 패전 뒤에도 카이저가 있었다. 중공군이 매복하고 있을 게 뻔한 계곡으로 2사단을 밀어 넣은 것이다. 카이저 휘하 23연대장이었던 프리먼 대령은 사단장 명령에 불복하고 다른 길로 탈출했다. 그 덕에 다른 연대에 비해 절반의 희생만 치르고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적유령의 참사는 카이저 자신에게도 엄청난 상처로 남았다. 훗날 백선엽 장군이 미국을 방문했다가 카이저 장군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됐는데, 자리를 마칠 때까지 카이저는 우울한 표정으로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전쟁 중 한국 국군 장군과 미군 장군의 작전 회의 모습. 아이젠하워(왼쪽 첫 번째), 정일권(오른쪽 세 번째), 백선엽(정일권 뒤 맨 뒷줄) 장군 /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83호
필자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소장

인터비즈 권성한, 박은애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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