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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청계천 프로젝트', 왜 성공 확신하고도 밀어붙이지 않았나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조선시대의 청계천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청계천과는 많이 달랐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청계천의 본류다. 반면 조선시대의 청게천은 남북으로 거미줄처럼 지류가 뻗어 있었다. 덕분에 도성 안 사람들에게 청계천은 식수였고, 빨래터였으며, 하수도였다. 그런데 영조가 재위하던 18세기, 청계천에 문제가 생겼다. 인구가 급증하고, 농촌 분화로 농업에서 이탈한 빈민들이 도시로 몰리면서였다. 한양으로 올라온 빈민들은 주로 청계천변에 자리 잡았다. 식수를 얻기 편하고 하천가의 빈 땅에서 경작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청계천의 면적은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막무가내로 버려진 쓰레기는 물길을 막았다. 작은 비에도 물이 범람했고, 죽은 짐승과 사람의 시체가 하천을 따라 흘렀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1904년의 청계천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 밖으로 나가 백성들을 설득한 영조의 '여론 조사'...

이를 해결하려면 청계천을 파내 물길을 뚫어야 했다. 당시 조선의 관행은 '내 집 앞의 눈은 내가 치워야 한다'였다. 그래서 도로나 다리, 축성 등의 건설도 해당 지역 주민들의 부역으로 이뤄졌다. 이 원칙대로라면 청계천을 파내는 것도 청계천 주변 사람들만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청계천이 너무 심하게 막혀서 주변 사람들만으로는 공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모든 흙과 오물을 일일이 사람들의 손으로 파내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성 주민 모두를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하다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영조 어진 /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1754년 3월, 영조는 한양의 각 지역 주민대표자를 궁궐로 불러 청계천 준설공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사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고민하던 영조는 호위 군사들과 궁중 악단의 악사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호의적 여론 집단이었다. 영조는 이들이 눈치껏 찬성 분위기를 조성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영조의 예상대로 대부분이 찬성 표를 던졌다. 하지만 악사 한 명이 초를 쳤다. "개천을 파든 안 파든 나는 상관없습니다.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가는 것이 안 됐기는 하지만 그건 그곳에 사는 집주인의 문제입니다." 이 눈치 없는 악사 한 명으로 인해 여론몰이를 해보려던 영조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영조는 이 악공에게 솔직하게 얘기했다고 칭찬하고 포상을 내렸다. 하지만 속은 말도 못 하게 쓰렸을 것이다. 
<준천사실(濬川事實)>. 1760년(영조 36)에 한성판윤 홍계희(洪啓禧)가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책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는 좌절하지 않고 청계천 공사의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했다. 과거 시험에 '청계천 공사의 장단점을 논술하시오'라는 문제를 내고 1등에게는 바로 관직을 주는 특혜도 베풀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공청회도 열었다. 또, 궁 밖을 나가 청계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설득하는 작업을 3~4년 간 지속했다. 조선의 왕 중에서 이렇게 직접 백성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왕은 영조가 처음이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1760년 2월 18일, 대망의 청계천 공사가 시작됐다. 한양 전 지역에서 찾아온 지원자가 7000명을 넘어섰다. 결국 청계천 준설이 한양 전체 주민들의 이익이라는 점을 납득시킨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던 날, 영조는 직접 현장에 나와 첫 삽을 떴다. 공사의 시작을 말하는 '첫 삽을 뜬다'는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그만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프로젝트의 성패는 소통이 결정한다

어전준천제명첩 (御前濬川題名帖). 영조 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천공역(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이다. 어좌만 있고 영조는 없는데 이는 그림에 왕을 그리지 않는다는 예법에 따랐기 때문이다 /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조는 공사가 시작된 후에도 공사현장을 공개해 주민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공사의 필요성을 알리고 주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영조의 판단이었다. 영조는 때때로 직접 현장에 나가 백성들과 섞여 앉아 공사를 관람하기도 했다. 결국, 청계천 공사는 57일 만에 대성공으로 끝났다. 

우리가 보통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고려하는 것은 사업의 목적과 필요성은 무엇이고, 비용은 얼마나 들지, 예상 수익은 얼마나 될지 등이다. 반면 구성원들이 해당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도록 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영조는 달랐다. 청계천 공사의 성공 비결은 청계천 준설이 청계천 주변 사람들만의 이익이 아니라 한양 전체 주민들의 이익이라는 점을 납득시킨 데 있다. 끊임없는 소통과 기다림의 결과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청계천의 풍경 /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창의와 혁신을 요구한다. 하지만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나의 일'일 때 나오는 법이다. 무턱대고 창의와 혁신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구성원들이 창의와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영조가 중흥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공감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사실 "마음 같아서는 공사를 밀어붙이고 싶다"고 말했다. 공사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공감대가 확산될 때까지 기다렸다. 청계천 주변에 나가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4년 동안 영조는 청계천만 생각하며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한다. 그래도 기다린 이유는 프로젝트는 성공해야 의미가 있고, 영조에게 성공이란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공이 그 프로젝트 하나만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프로트의 기반이 된다. 밀어붙이면 프로젝트 하나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조직원은 지치고 불만은 누적돼 다음 프로젝트는 탄력을 잃는다. 

청계천 프로젝트는 이후 영조가 새로운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영조는 노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의 가장 성공적인 업적이 청계천 정비 사업이다"라고. 이 말은 결코 청계천의 물길을 뚫었다는 토목공사 하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56호
필자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인터비즈 최예지, 이방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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