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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칼' 든 폴란드에 패한 까닭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총 든 사람이 칼 든 사람에게 패한다? 언뜻 이해 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는 이 같은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무기의 우열이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사를 통해 비즈니스 혁신에는 두 가지 함정에 대해 살펴보자.



전쟁의 판도를 바꾼 화약의 발명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전쟁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화약이다. 특히 총의 발명으로 전쟁의 양상과 전술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17∼18세기 동안 총과 대포가 전쟁을 지배하면서 창과 칼, 심지어 기병까지도 가치를 위협받게 됐다.

16세기에 총이 등장하자 화약병기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총과 대포가 기병을 퇴장시킨 것처럼 알려졌지만 사실 총이 나오기 전부터 기사의 영광은 사라지고 있었다. 과거 기사가 전쟁을 지배했던 것은 기병이 보병보다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보병들의 무장이 열악했고 훈련이 덜 됐던 탓이었다. 고대부터 야무지게 조직된 보병들이 장창의 숲을 형성하면 기병들은 맥을 못 추렸다. 후대로 오면서 전문 군인 집단이 양성되고 훈련이 충실해지자 보병은 점점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동양의 기병, 특히 유목 기병은 탁월한 기마술과 궁술로 무장한 덕에 창병을 사격으로 제압하고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무장 기병을 선호하는 서구의 기사들은 육탄으로 창의 숲을 돌파해야 했다. 이런 육탄 돌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히 스위스 용병대처럼 잘 훈련되고 전의로 똘똘 뭉친 보병 군단은 기병의 공격을 거의 붕괴시켜버린 전과를 여러 차례 올렸다. 도끼창으로 무장한 보병 밀집 창병 대형은 기사들에게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됐다.

그때 총이 발명됐다. 총의 발명은 기병들이 보병 군단의 창의 숲에 육탄으로 부딪히지 않고 창날의 바깥에서 창병을 사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보병들도 총으로 무장했지만 17세기까지 소총의 유효사거리는 겨우 25m 정도였다. 사격 속도는 1분에 2발 정도였다. 보병들이 아무리 교대로 순환 발사를 해도 장전 시간이 너무 길어 소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대기하던 기병들이 뛰어들기에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기병들은 언제나 보병들보다 중무장을 할 수 있었다. 기병들은 보병의 코앞까지 접근해서 소총을 들이댄다. 그것도 말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창 대신 총으로 무장한 기병
밀집 보병 대형을 향해서 피스톨을 든 기병들이 선회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출처 archivoshistoria.com)
이 황홀한 장면에 매료된 기병들은 16세기가 가기 전, 총이 아직 원시적 상태에 있을 때에 서둘러 기병창을 버리고 총을 집었다. 기병을 위한 짧고 간편한 소총이 개발됐고 이보다 더 간편한 피스톨도 나왔다. 화약을 재우고 부싯돌로 화승을 점화해야 하는 화승총과 달리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돌아가면서 화약을 점화하는 보다 간편한 격발장치도 개발됐다. 이때의 피스톨은 겨우 한 발밖에 쏠 수가 없었지만 작고 가벼운 탓에 두 자루 정도는 상비할 수 있었다. 

기병은 보통의 유효 사거리인 25m 근처에서 한 발을 쏘고 더 근접해서 한 발을 더 쏜다. 창병 몇 명이 쓰러지고 공포에 사로잡힌 보병이 진을 깨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기병은 말을 달려 도망치는 적병의 등 뒤에서 칼로 살육을 시작한다. 적이 버티면 기병들은 즉시 옆으로 말을 달려 보병의 사격권에서 벗어나고 후위의 기병이 다시 돌격한다. 빠져나간 기병은 본 대형의 맨 뒤로 돌아가 다시 총을 장전한다. 이런 식으로 기병들은 무너질 때까지 계속 선회하며 보병들을 압박한다.

그러나 이 선회 전술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총신이 짧아진 피스톨은 명중률이 더 형편없었다. 게다가 기병은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말위에서 총을 쏜다. 선회 대형은 복잡하고 낭비적이었다. 총을 사용하면서 백병전을 연습하지 않게 됨으로써 기병들의 전투력은 떨어졌다. 기병과 보병이 서로 총으로 대결할 때에는 보다 명중률이 높은 집단이 승리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피스톨을 이용한 기병들의 선회 전술은 요란하고 부산스럽기만 하지 실효성은 없는 겁쟁이들의 전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610년 클루시노 전투(Battle of Klushino)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610년 클루시노 전투
클루시노 전투에서 폴란드 정예군의 밀집대형 (출처 위키피디아)
1610년 폴란드가 클루시노 지역에서 러시아·스웨덴 연합군과 맞붙었다. 당시 폴란드는 유럽에서 제일 낙후된 지역으로 피스톨이 부족해 거의 창과 기병도(사브르)로 무장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이 선회 전술을 사용해서 폴란드 군에게 일제 사격을 퍼붓고 선회하려고 할 때 폴란드 기병들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러시아와 스웨덴 기병들은 당황했으나 피스톨을 장전할 틈이 없었다. 행여나 발사를 해도 적을 말에서 떨어뜨릴 확률은 10%도 되지 않았다. 화약무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에 그들은 검술과 창술이 서툴렀다. 용감한 폴란드 기병들은 헛되이 저항하는 신식 기병들의 선회 대형을 조각조각 내고 박살내 버렸다.

충격을 받은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기병들은 겁쟁이 전술을 버리고 다시 기병도를 들었다. 화약무기를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소리만 요란한 무기에 의존해서는 기병이 허풍쟁이 부대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뜨거운 화약병기와 서늘한 검날, 즉 냉병기를 함께 장착했다. 적진과 충돌할 때는 냉병기에 의존하고 적진에 돌입하고 난전이 벌어지면 피스톨을 보조적으로 사용했다. 오히려 이 변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제야 화약무기도 제 역할을 찾았으며 기병대가 의장대로 전락하는 것을 150년 이상 늦췄다.



서늘한 검날, 참담한 패배

1914년,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이 전쟁은 곧 수천만 명의 사상자를 낼 세계 대전으로 비화할 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이유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무기와 기술의 발전에는 열심인 반면 그것에 대처할 전술 개발에는 소홀했던 탓이었다. 모두들 강력한 살상 무기를 개발, 장착해서 적을 일거에 박살내 버리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더 강력한 소총과 기관총, 무시무시한 대포의 개발에 열을 올렸고 강력한 화력으로 단숨에 적을 섬멸하는 공격 전술에 집착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터지자 서로 간에 이런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물 같은 살상 기계 앞에 병사들을 무모하게 돌격시키는 꼴이 돼 버렸다.
1차대전 당시 등장했던 무기들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건 나은 편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더 비참한 비극이 준비되고 있었다. 1차 대전 직전 러시아의 군사 개혁과 전쟁 준비를 책임진 사람은 블라디미르 수콤리노프 장군이었다. 19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터키 전쟁에 젊은 기병 장교로 참전했던 그는 기병도를 들고 과감한 돌격을 감행해 획기적인 승리를 거뒀다. 운 좋게도 그의 승리는 기병의 검과 창이 위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술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콤리노프는 이 단 한 번의 전투 경험을 영원한 진리로 믿었다. 그는 차가운 검날과 용기를 대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했다. 그는 늘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대전이란 사악한 기술혁신일 뿐이다… 난 지난 25년간 군사 교본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서자 그는 화기 전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신적인 교관을 모조리 참모대학에서 파면했다. 심지어 러일전쟁에서 무참하게 당한 뒤에도 러시아 군의 개혁을 거부하고 현대전과 현대 군사과학에 대한 연구마저 중지시켰다. 그는 포탄과 소총, 총알 생산 공장 증설도 거부했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선진 무기와 선진 전술을 고사하고 단순히 포탄의 양에서도 서방 군대의 3분의 1도 못 되는 분량을 가지고 1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참혹한 패배를 거듭했고 국가와 지휘관에 대한 병사들의 분노가 러시아 혁명과 제정 러시아의 종말을 초래했다.


변화와 신기술을 대할 때 벌어지는 두 가지 오류

클루시노 전투와 수콤리노프의 군사정책은 변화와 신기술을 대할 때 종종 벌어지는 두 가지 오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7세기 클루시노 전투는 신기술에 너무나 성급하게 열광해 변화에 너무 개방적이었던 탓에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에 큰 낭패를 안겨줄 뻔했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참혹한 패배에 상당한 원인 제공 역할을 한 수콤리노프는 신기술의 힘에 너무 무감하거나 보수적이어서 화를 불렀다. 이 두 가지 사례는 현재에도 예외 없이 벌어지고 있어서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화기를 둘러싼 17세기와 20세기 사건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두 경우 모두 기술의 실상과 변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17세기 기병들은 화약의 무기를 과대평가했고 20세기 러시아는 과소평가했다. 

믿기지 않지만 이 둘 다 객관적인 실험과 분석적 태도만 있었다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감정과 욕망이 객관적 판단을 저해했다는 점 역시 닮아 있다. 클루시노 전투 당시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백병전을 피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서늘한 검날 대신 겉보기에 화려한 피스톨을 선택했다. 수콤리노프로 대변되는 20세기 러시아는 구세대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고루한 욕망이 이성을 가렸다.

현대 사회는 변화와 신기술이 넘쳐 난다. 보수적 태도는 거의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와 변화에 목말라 하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두 가지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게 된다. 지도자일수록 자신의 판단과 고집, 선입견이 개인적 욕망과 유혹에 사로잡힌 게 아닌지 늘 검증하고 조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97호
필자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인터비즈 오종택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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