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조직관리백만대군 몰고 고구려 침공한 수양제, 어떻게 실패했나?

백만대군 몰고 고구려 침공한 수양제, 어떻게 실패했나?

[DBR/동아비즈니스리뷰]역사에는 가끔100만에 가까운 대군이 등장한다.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의110만 대군이 대표적이다. 이100만이라는 숫자는 과장된 수치가 아니었다.그리고 대규모 병사가 참전했던 여러 전투 중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수양제의 모습
우리는 수양제의100만 대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고구려가 이들을 격퇴했다는 사실만 강조할 뿐, 정작 수나라 군대가 왜 처참하게 패배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진정한 승리자가 되려면 적에게서 배우는 자세,적의 시각에서 승리와 패배를 분석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수나라가 만주의 고구려 정복을 위해 최대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하고도 패배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캡쳐
6세기 말 혼란했던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비장했다. 만주의 고구려를 방치했다가는 결국 중국이 침공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 한다는 결사적인 각오로 전쟁을 개시했다.수양제는609년에 고구려 침공 전쟁의 준비를 선언했고2년 동안 준비를 계속했다.전국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합한 결과, 그 수가100만이 넘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4번 침공했는데100만 대군을 동원한 침공은2차 침공이었다.북경에서 출발한 수나라군은 요하를 방어선 삼아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고구려의 방어선으로 밀려왔다.그리고 북쪽의 요충인 신성과 중앙의 요동성을 동시에 공격했다.



패인 ① 보급로 없이 감행한 무리한 진격
출처 KBS 역사스페셜 캡쳐
수나라가 엄청난 병력으로 밀어붙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전투력은 대단해서 단 한 개의 성도 함락되지 않았다. 화가 난 수양제는 전쟁사에서 보기 힘든 대담한 작전을 명령한다. 고구려군의 방어선과 산성을 무시하고 30만의 정예부대를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직공하게 했다.

이러한 작전은 현대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전격전과 유사한 전술이었다. 후방 고립과 보급선의 차단을 우려하지 않고 돌진하여 적의 심장을 파괴하면 중간에 있는 적군은 저절로 무너진다고 계산했다. 전격전은 상대에 비해 빠른 속도와 기동성을 갖춘 부대가 핵심이었지만, 수나라 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병사들은 본인의 장비와 식량까지 짊어지고 이동해야 했다. 현대처럼 간이식량도 없는 상황에서 무거운 한 달분의 식량을 가지고 쉬지 않고 행군해야 겨우 평양성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평양에 도착한 이후에도 성 함락을 위한 전투기간과 돌아갈 때 필요한 식량은 없다는 의미였다. 

왜 이렇게 대담한 전술을 구사했을까? 사실은 대담하다기보다는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군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기에 나온 고육책이었다. 전격전과 같이 대담한 작전은 철저한 준비와 훈련을 요구하지만, 그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이는 작전은 구상과 실행이 따로 놀 수밖에 없다. 대담하고 기발한 작전일수록 사실은 철저한 준비와 예측이 필요했지만 수나라군은 제대로 된 전격전을 감행할 전술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패인 ② 수군 리더 내호아의 자만심


전격전을 위해 수나라군이 마련한 비장의 방법은 산동반도에서 출발하는 5만 명의 수군이 해로로 식량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요동에서 출발한 육군은 대동강에서 수군을 만나 식량을 보급받고 평양성 공격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평양으로 진격하던 수군 제독 내호아는 평양성을 지키는 고구려 병력이 적다는 사실을 알고 단독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버리겠다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내호아가 자만심에 무턱대고 공격할 것을 예상했던 고구려군은 후퇴 유도작전을 써서 평양 외성 안으로 적을 유인한 다음 복병으로 역습하여 이들을 섬멸했다. 겁이 난 해군은 산동으로 귀환했고 굶주리고 지친 수나라 육군은 그 직후에 평양에 도착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 캡쳐
수나라 육군은 이미 식량이 떨어졌는데 식량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그 다음은 뻔했다. 굶주린 상태에서 수나라 육군은 고구려 땅을 가로질러 만주로 귀환해야 했다. 고구려군이 그들을 가만둘 리 없었다. 어떤 군대도 굶고는 싸울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전열을 상실한 채 마구 도망치기 시작했다. 군대가 대열을 버리고 공황에 빠지면 남는 건 죽음뿐이다. 요동까지 살아서 도망친 사람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패인 ③ 산성 전투에 대한 경험 부족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캡쳐
더 근본적인 패인은 수나라군이 고구려의 땅과 군대에 대한 맞춤형 전술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수나라 군대가 주로 싸웠던 군대는 초원의 유목민족인 돌궐족이었다. 반면 고구려군은 기병도 훌륭하지만 산성에 기반한 수성전의 대가였다.수나라군은 돌궐이든, 중국의 내전에서든 산성 전투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연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장점인 병력과 물자에 의존하는 전략을 수립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점을 살리라는 말이 상대방에 대한 분석도 포기하고 맹목적으로 자기 장점에 의지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패인 ④ 잘못된 수나라의 인사 체제

수나라는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닌 군대였다. 주요 지휘관은 모두 전투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그게 최선의 선발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여러 패인들 중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수군 제독 내호아였다. 하지만 수양제는 전후에 내호아를 전혀 처벌하지 않았고 수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그의 지위를 유지시켰다.이것은 수나라의 인사 체제가 인정과 감성에 크게 경도돼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력서상으로는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최상의 인재로 선발된 조직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리더의 판단은 100만 명이 넘는 병사가 목숨을 잃을 정도의 참극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출처 SBS 대하드라마 연개소문 캡쳐
+a) 살수대첩으로 백만대군 섬멸? 잘못된 사실
수나라군의 패인에 대해 우리 역사가들은 수나라 군대가 숫자만 많았을 뿐 병력을 채우기 위해 무리하게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는 사실과 살수에서 고구려군의 절묘한 수공작전을 원인으로 든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은 옳지 않다. 물론 100만 명 모두가 정예병일 수는 없었겠지만, 수나라군 정예부대와 장수들은 모두 중국의 내전과 돌궐과의 전쟁에서 오랫동안 실전 경험을 거치고 검증된 장병들이었다. 살수에서의 수공 역시 실화가 아니라 전설에 가깝다. 중국 기록이나 삼국사기 어디에도 살수에서 수공을 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들판에서 고구려군과 수나라 정예병이 정면으로 맞붙은 대규모 전투였을 확률이 높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32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박근하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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