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

'구두쇠 경영'으로 70년 간 가구 공룡 통치

[인터비즈]

앞의 기사 [스웨덴 농부의 강철 생활력, '가구 황제'를 키워내다]에서 계속
출처 인터 이케아 웹사이트
지독한 구두쇠
캄프라드는 구두쇠 경영자로도 유명했다.그는70, 80이 넘어서도 전차나 버스 등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거부로 유명했다.한국의 경로 우대증에 해당하는 시니어 시티즌 증명서를 보여주며 악착같이 할인 혜택도 받았다. 대중교통의 운행이 뜸한 주말에는 낡은 볼보를 몰고 다니고 비행기를 탈 때는 예외 없이 이코노미석을 이용했다.호텔도 싼 곳을 찾아 작은 객실에 묵었다.미니바는 일절 이용하지 않고 주변 가게에서 물과 음식을 사다 먹었다.차를 마실 때도 티백을 절대로1번만 쓰지 않고2번 이상 우려먹는 사람이 바로 캄프라드였다.

그는 직원들에게도 이런 태도를 강요했다.이케아 직원들은 반드시 양면지를 사용해야 한다.캄프라드에게 제출하는 보고서라도 예외가 없었다. 400km이하의 거리를 출장 가는 직원들에게는“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이용해라.설사 비행기를 타더라도 반드시 이코노미석만 타라”고 종용했다. 한 번은 한 임원이 일등석을 타기 위해 캄프라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코노미석이 다 팔렸습니다.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약속이라 지금 당장 이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야 합니다.”캄프라드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케아에 일등석은 없소.대신 자동차를 이용하면 될 거요.”결국 해당 임원은 택시를 타고5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렸다는 후문이다.
<캄프라드 어록>

-구두쇠라는 세간의 평가가 매우 자랑스럽다.

-자원을 낭비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는 것이다.

-1원을 절약하면1원을 벌 수 있다.당신이 억만장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면지 사용은 당연하다.신흥국 진출을 위해 회사가 버는 모든 돈을 유보금으로 남겨둬야 한다.
캄프라드는 일상에 필요한 물품 구입도1년에 한 번 성탄절 직후 실시하는 대형 바겐세일을 이용했다.당연히 물품 구입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이케아 매장.캄프라드는 특히 이케아 매장에서 떨이 상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일을 즐겼다.식사도 종종 이케아 매장에서 해결했다.수십 조 원의 재산을 지닌 세계적 거부가 왜 이렇게 살까.

캄프라드는 한 인터뷰에서 지독한 근검절약의 이유를 밝혔다.첫째,고객에게 파는 상품의 가격을 한 푼이라도 싸게 해줄 수 있다.경비 절감은 원가 절감으로 이어지고,원가 절감은 제품의 가격을 한 푼이라도 낮춰주는 원동력이 된다.둘째,이케아의 미래를 위해 늘 여유 자금을 비축해둬야 한다.그 돈으로 신흥시장 진출에 투자할 수 있고 굳이 상장을 단행할 필요도 없다.셋째는 아낀 돈으로 남을 돕는다.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캄프라드는 상당한 기부를 했다.그는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의 주요 후원자다.

캄프라드는 생전“나도 가끔 호사를 즐긴다”고 항변한 바 있다.그가 말한 호사란 계절마다 새 셔츠를 사는 일,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있는 작은 포도원을 찾는 일,매년8월 고향 알름훌트를 찾는 일이다.그는“포도원을 방문할 때는 직접 술 담그는 작업에 참여해 내가 만든 포도주를 즐긴다.고향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토마토를 기르며 휴가를 보낸다”고 했다.

탈세,친나치 논란 딛고 귀향
막대한 재산을 지닌 캄프라드의 인생이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그는30년 넘게 알콜 중독에 시달렸다.게다가 친(親)나치 전력을 빼놓을 수 없다. 캄프라드의 어머니는 스웨덴인이지만 아버지는 독일에서 태어나1살 때 스웨덴으로 이주한 독일계로 친가 조상들은 대대로 독일 중부 튀링겐에 살았다.특히 그의 증조모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2대 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의 사촌이다.힌덴부르크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해 나치 독일 성립의 길을 열었다. 
캄프라드의 친가 쪽 조상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해 나치 독일의 계기를 만들어 준 인물/출처 위키피디아
독일계 혈통이라는 집안 내력이 있어서인지 캄프라드는 젊은 시절 친구가 세운 나치 단체에 잠시 몸담았다.당시 그의 절친이던 페르 양달은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우상화하고 나치즘을 지지한 단체를 세웠다.이에 캄프라드는70대가 됐을 때“철없는 시절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나치 가담을 공식 사과했다.

이케아 가구의 유해성 및 각종 사망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이케아가 흔히 쓰는 가구 재료는 중밀도 섬유판(MDF)이다.톱밥을 본드에 절여 만든 판으로 포름 알데히드 같은 인체에 유해한 기체를 상당량 내뿜는다.포름 알데히드는 새 집 증후군과 아토피 피부병의 주요 원인.특히 어린이에게 매우 유해하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실내 가구의 방출량을 규제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북미 시장에서는 이케아의 대표 가구‘말름 서랍장(Malm dresser)’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속출했다.가볍고 옮기기 쉬운 가구라는 뜻은 그만큼 견고함이 떨어진다는 뜻도 된다.화장대를 벽에 고정시키는 형태의 이 서랍장이 종종 방바닥에 엎어지면서 서랍장 아래에 깔린 영유아들이 숨졌다. 2017년11월 이케아는 약3000만 개의‘말름 서랍장’리콜을 밝혔지만 소비자 신뢰는 상당히 추락했다.
말름 서랍장/출처 이케아 홈페이지
이케아는2014년 한국에 진출했다.한국에서도 다른 나라보다 비싼 가격,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일 등으로 각종 논란을 야기했다.방글라데시 등 저개발국에 세운 공장에서 싼 값에 아동 등을 부린다는 착취 논란도 여전하다.

후계 문제도 순탄치 않았다.첫 번째 아내 케르스틴과의 사이에서 딸 아니카를 입양한 그는48년 간 결혼 생활을 한 두 번째 아내 마가레타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뒀다.캄프라드가 늙어갈수록 이케아의 복잡한 지배구조 때문에라도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의견이 늘어났다.하지만 그는“아들들이 못 미덥다.아직 경영권을 물려줄 때가 아니다”라며 후계자 확립을 피했다.그러다 죽기 직전에야 막내아들 마티아스를 최고경영자로 지명했다.
잉그바르 캄프라드/출처 인터 이케아 웹사이트
캄프라드가 사랑한 둘째 아내 마가레타는201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슬픔에 빠진 그는2014년38년 만에 다시 고향 스웨덴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2007년 스웨덴이 부유세를 폐지해 세금 부담이 크게 줄었다.둘째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여우가 죽을 때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두듯 아내를 잃은 노인 캄프라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졌기 때문.캄프라드는 귀국 당시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스위스에서 사는 일이 힘들어졌다.가족,옛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다.”결국 그는 고향에 돌아온 지4년 만에92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가구의 모든 조각을 평평한 판으로 분리해 포장한다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상업화한 경영자.가구 매장은 단순히 가구만 사는 곳이 아니라 온 가족이 휴일을 보낼 수 있는 일종의 놀이공원이라고 주장하며‘이케아 매장=스웨덴 판 디즈니랜드’를 만든 경영자.각종 논란에도 그가 세계 가구업계와 유통업계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이것이 캄프라드의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출처 Pixabay
<참고문헌>
-이케아,그 신화와 진실,엘렌 루이스 작,이기홍 옮김,이마고, 2012
-잉그바르 캄프라드 영문 위키피디아

글/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 하정민 차장(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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