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CEO 열전: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의 위대한 독불장군...작은 화투 회사에서 게임 제국으로

[CEO 열전: 야마우치 히로시] 닌텐도의 위대한 독불장군...작은 화투 회사에서 게임 제국으로

[인터비즈]일본 닌텐도(Nintendo,任天堂)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비디오 게임 업체다.하지만 닌텐도 전체의 역사를 봤을 때,이 회사가'비디오 게임 업체'로 활약한 시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악의 상황에서 가업을 잇게 된 22세의 대학생
닌텐도 전 CEO 야마우치 히로시(1927 ~ 2013)
닌텐도는1889년에 창업했으며,초기의 주력 사업은 화투 및 트럼프 카드 생산이었다.전자총 기반 게임 사업을 시작한 것이1973년부터,본격적인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한 것은 불과1977년부터다.

80년 넘게 화투와 트럼프만 만들던 닌텐도를 세계적인 명성의 비디오 게임 업체로 거듭나게 한 이는 바로1949년부터 회사를 이끈 야마우치 히로시(Hiroshi Yamauchi,山内溥, 1927 ~ 2013)다.

하지만 그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닌텐도의 세 번째 사장이 되었을 무렵,그는22세의 대학생(와세다대학 법학과)에 불과했으며,사내의 분위기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본래 닌텐도의3대 사장이 되었어야 할 야마우치의 아버지(데릴사위)는 불륜여성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상태였으며,닌텐도의 직원들은 노동쟁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대학생이었던 야마우치 입장에서 이런 상태에서 가업을 이어받는 건 딱히 끌리는 일이 아니었다.이에 그는 회사 경영에 간섭할 우려가 있는 사내의 인척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제안했으며,할아버지가 이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김으로써 닌텐도의 사장직을 수락하게 되었다.사장에 오른 야마우치가 과감한 사내 개혁을 추진하면서 사내의 노동쟁의도 진정되었고 신제품 개발도 진행되었다.


한 번의 성공에 취한 젊은 사장, 회사를 도산 위기로 내몰다

1953년,닌텐도는 일본 최초로 플라스틱 재질의 트럼프를 개발해 눈길을 끌었으며, 1959년에는 미국 디즈니와 라이선스를 맺고 캐릭터 트럼프를 출시했다.이를 통해 이전에는 단순히 도박용 도구에 그쳤던 트럼프가 온 가족을 위한 놀이도구로 거듭날 수 있었다.플라스틱 트럼프와 디즈니 캐릭터 트럼프가 높은 인기를 끌면서 닌텐도는 업계 선두의 자리에 올랐다.
2018년 현재도 팔리고 있는 닌텐도의 트럼프와 화투
실적이 올라가고 자금 여유가 생기면서 야마우치는 다른 업종으로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0년에는 택시 사업에 진출하고1961년에는 식품 사업을 시작하는 등,그야말로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했다.하지만 새로 진출한 사업의 성과는 좋지 않았고,트럼프의 인기마저 사그라져 닌텐도는 도산위기에 몰린다.



'놀이'의 가능성은 무한대

위기에 처한 야마우치는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한편,회사의 기반이었던'놀이'에 집중하기로 하고 이러한 방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난감 사업 진출을 모색했다.그리고 이 즈음인1965년에 합류한 인재가 바로'요코이 군페이(Gunpei Yokoi,横井軍平, 1941 ~ 1997)'다.요코이는 본래 닌텐도 트럼프 공장의 설비 관리직으로 입사했다.하지만 유달리 호기심이 많은데다 공학도답게 손재주가 뛰어나 가끔 자신만의 장난감을 만들어 사내에서 가지고 놀곤 했다.
닌텐도에서 1966년에 출시한 '울트라핸드'
이를 우연히 목격한 야마우치는 요코이가 고안한 몇 가지 장난감을 유심히 보다가 상품화를 결정했다.대표적인 제품이 산업용 로봇팔에서 모티브를 얻은'울트라핸드(1966년)'였는데,이 제품이 큰 인기를 끌며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닌텐도는 도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야마우치는 요코이의 성과를 인정해 그를 완구 개발부의 주임으로 앉히고 제품을 기획하게 했다.

뒤이어1970년에는 태양전지를 센서로 이용해 목표를 조준하고 쏠 수 있는 광선총 장난감을 개발,이 역시 큰 히트를 기록했으며, 1973년부터 닌텐도는 아예 넓은 공간에서 광선총 사격을 즐길 수 있는 게임장도 열어 이 역시 인기를 끌었다.

이에 힘입어 닌텐도는 광선총 게임장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 시기에1차 오일쇼크가 전세계를 강타,경기가 침체되자 닌텐도 역시 적잖은 손실을 입게 된다.하지만 이를 통해 야마우치는 게임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남들과 조금 다른 길, 그리고 첫 번째 대성공

그리고 이 때를 즈음해 일본 타이토(Taito)사에서 개발한 업소용 게임인'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s, 1978년)'가 전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게임센터(오락실)시장이 본격적으로 개막했다.그리고 미국 아타리(Atari)사에서 개발한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VCS(Video Computer System, 1977년)역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면서 게임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닌텐도 역시 스페이스 인베이더와 유사한 업소용 게임을 출시해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그리고1977년에는 단순한 게임 몇 가지가 내장된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인'컬러TV게임(カラー テレビゲーム)'을 출시하기도 하는 등,서서히 게임 전문업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쟁사의 것을 따라 하는 것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더욱이 당시 업소용 게임 시장은 타이토,가정용 게임 시장은 아타리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닌텐도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이 때 아이디어를 낸 것이 요코이 군페이였다.

요코이는 당시 보급이 본격화되던 휴대용 전자계산기의 기술을 응용한 휴대용 게임기를 개발할 것을 건의했고 야마우치는 이를 승인했다.이를 통해1980년에 첫 출시된 것이 바로'게임&워치(Game & Watch)'다.
1980년에 첫 출시된 '게임 & 워치(Game & Watch)'
게임&워치는 한 기기당 한 가지의 게임만 즐길 수 있었고,화면의 품질도 지금 기준에선 극히 조악한 수준이었다.하지만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갈 정도로 크기가 작아 어린이나 청소년도 손쉽게 가지고 다니며 즐길 수 있었으며,전력 소모가 적어 배터리 수명도 길었다.그리고 게임을 하지 않을 때는 알람 기능을 가진 탁상시계처럼 쓸 수도 있었는데,시계가 귀하던 당시 상황에선 이 역시 호평을 받을 만 했다.

게임&워치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더 다양한 게임을 즐기기 위해 여러 종류의 게임&워치를 사는 경우도 많았고,청소년들 사이에선 자신이 더 많은 게임&워치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였다.

해외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일본에선1985년에 단종되었지만 해외 시장에는1991년까지 신제품이 출시될 정도였다.게임&워치는 일본 내에서 총1,287만대,해외에서 총3,053만대가 팔리며 닌텐도를 돈 방석에 올려놓았다.이는 향후 닌텐도가 세계적인 게임 전문 업체로 발돋움하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설익은 게임시장에 닥친 위기
아타리가 개발한 가정용 게임기인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 / 출처 아타리 홈페이지, 위키백과
한편,이 무렵 북미를 중심으로 한 게임 업계에 큰 위기가 다가온다.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던 아타리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이유 중 하나는 품질 낮은 게임의 범람이었다.

아타리는 매출을 올리는데만 급급했을 뿐이지 자사 게임기용 게임의 내용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온갖 업체들이 아타리 게임기용 게임을 개발해 출시했는데,태반이 소비자 우롱 수준의 조악한 품질이었고,성폭행을 소재로 한 음란 게임까지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고 버젓이 팔릴 정도였다.

더욱이,워낙 다수의 업체들이 우후죽순 수준으로 수많은 게임을 출시하다 보니,팔리지 않고 쌓이는 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고,이는 게임 개발사뿐 아니라 판매점들에게도 부담이 되었다.이런 공급 과잉의 와중에 게임의 품질 자체도 형편 없었으니 소비자들의 외면 속에 게임기 및 게임 소프트웨어의 판매량은 급격히 하락했다.결국1983년 전후부터 북미 게임 시장은 급속한 침체기에 빠졌는데,일본에서는 이를 일명'아타리 쇼크'라 부른다.



세계 정상에 우뚝 서다

한편,이런 와중에도 업소용 게임 시장은 꾸준한 성장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게임&워치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번 야마우치는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가정용 게임기 사업을 구상했다.

첫 번째 목표는 업소용 인기 게임을 가정에서도 양호한 품질로 재현할 수 있고,소프트웨어 교환이 가능한 게임기였다.반도체 회사인 리코(Ricoh)사와 협력을 통해2년여의 개발기간을 거쳐1983년에 일본에 첫 출시된'패밀리 컴퓨터(Family Computer,약칭 패미컴)가 그 결과물이다.북미에선'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약칭NES)'이라는 이름으로1985년에 출시했다.
패밀리 컴퓨터(1983년)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게임 시장을 장악한다
패미컴은 당시 인기를 끌던'동키콩',제비우스'등의 업소용 게임을 무난하게 이식할 수 있는 성능을 제공했으며,십자모양의 방향키와4개의 버튼을 탑재한 컨트롤러를 갖춰 대부분의 게임을 무난하게 조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점은 소프트웨어 품질 관리였다.닌텐도는 서드파티(외부개발사)에서 개발한 패미컴용 게임의 품질을 엄격하게 검증했으며,게임 소프트웨어가 담긴 롬 카트리지 역시 닌텐도에서 전량 위탁 생산하는 방식으로 출하량까지 통제했다.

덕분에 패미컴용 소프트웨어는 안정적인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공급 과잉으로 재고가 많이 남는 경우가 적어 판매점에서도 환영을 받았다.아타리 쇼크로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북미 시장에서도 특히 높은 호응을 얻은 건 물론이다.

이와 함께,닌텐도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게임 소프트웨어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대표적인 것이1985년에 출시된 액션 게임인'슈퍼 마리오 브라더스(Super Mario Bros)'였다.깔끔한 그래픽과 기발한 구성이 어우러진 이 게임은 단박에 패미컴과 닌텐도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 게임이 되었다.그리고 이 게임의 개발을 주도한 미야모토 시게루(宮本 茂, Shigeru Miyamoto)는 이후에도 다수의 인기게임을 개발하며 닌텐도를 대표하는 간판 개발자로 자리매김한다.

적절한 성능과 디자인,그리고 우수한 소프트웨어까지 보유한 패미컴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전세계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2003년 공식 단종될 때까지 패미컴은 전세계에 총6,191만대에 이르는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한다.



거듭되는 성공 뒤에 드리운 그림자

이와 함께1989년에는 게임&워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요코이 군페이가 개발을 주도한 소프트웨어 교체형 휴대용 게임기'게임보이(GameBoy)'를 출시,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게임보이는 낮은 화질의 흑백 화면을 탑재하는 등,하드웨어의 성능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하지만 긴 배터리 수명에 튼튼한 내구성을 갖춘데다 본체 가격도 싼 편이라 어린이들의'장난감'으로서는 최적이었으며,패미컴 못잖은 양질의 소프트웨어가 다수 공급되면서 매력을 더했다.가정용(거치형)에 이어 휴대용 게임기 시장까지 닌텐도의 천하가 된 것이다.

여세를 몰아 닌텐도는1991년,패미컴의 후속 모델인'슈퍼패미컴(Super Famicom,북미 제품명은'슈퍼NES)'을 출시해 인기를 이어간다.슈퍼 패미컴은16비트CPU를 탑재해8비트CPU기반의 패미컴보다 훨씬 높은 품질의 게임을 구현할 수 있었으며,패미컴 시절에 호평 받은 다수의 인기 소프트웨어의 후속작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세가, NEC등의 경쟁사들도 자사의 가정용 게임기를 내놓아 닌텐도에 대항했지만 닌텐도가 이미 구축한 높은 벽을 극복할 순 없었다.다만,이렇게 너무나 잘 나가던 닌텐도의 앞에 조만간 시련이 닥칠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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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IT동아 김영우(pengo@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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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비즈 박성지 정리
inter-biz@naver.com

※사진 : 닌텐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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