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이트 익스피디어(Expedia)의 일본판 Expedia Japan이 매년 발표하는 유급휴가 국제비교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직장인들이 휴가를 신청할 때 가장 눈치를 보는 나라입니다.

세계 28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6년 조사에서 휴가를 신청할 때 죄책감이 든다고 답한 직장인은 무려 69%로, 17%에 그친 스페인보다 4배나 높았습니다. 그밖에 휴가 중에도 메일을 확인한다는 비율이 23%로 역시 조사대상국 중 최고였고, 유급휴가를 다 사용한다는 비율은 53%로 꼴찌에서 두 번째를 차지했습니다. 정해진 휴가를 사용하는 데도 심리적 또는 제도적으로 제약이 많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 기업에서 근무하는 A씨의 일상을 들려드립니다. A씨는 글로벌 테크기업의 미국 본사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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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익혀야 했던 영어가 있다. 온갖 약어들이다. 이를테면 POV(Point of View, 관점/의견), CIL(Comments in Line, 이메일 답장할 때 보낸이의 질문에 바로 바로 답을 다는 방식), IMO(In my opinion, 내가 보기엔) 이런 식이다. 그러나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약어는 단연 OOTO와 WFH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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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TO는 ‘Out of the office’의 약자다. 말 그대로 자리를 비운다는 뜻이다. 사유는 제각각이다. 휴가를 낸다든지, 출장을 갈 때 자신과 밀접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John - OOTO 2/1-2/10” 식으로 일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인터넷 접속이 어렵다든지 통화가 안되는 경우라면 이 사실도 함께 명시한다. 회신을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다. 

OOTO의 사유는 휴가와 출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병원을 가야 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이사를 한다든지 등 각종 사연들이 총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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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병원을 가야할 일이 생겨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OOTO 공지를 띄우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병가를 냈다. (이곳의 휴가, 병가 등은 시간 단위로 올릴 수가 있다. 그래서 오후 3시에 퇴근할 심산으로 오후 3시부터 오후 5시까지 OOTO 일정을 띄우고, 병가를 2시간을 올렸다.) 

그런데 매니저가 나를 조용히 부른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 병가 결재를 반려할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이유는? 병원갈 일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생길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개인 휴가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건 부당하다. 병원은 우리가 일하는 시간에만 열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밤이나 주말에 한두시간 일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괜찮다. 하며 아주 기쁜 표정으로 반려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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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주 사용되는 약어는 WFH(Working from home)이다. 재택근무를 한다는 뜻이다. 이건 정말 이유가 다양하다. ‘오늘 내가 사는 곳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 WFH’ ‘오늘 배관공이 찾아오는 날이라 WFH’ ‘몸이 안 좋아서 WFH’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유들이 명시돼 동료들의 일정이 날아온다. 개근상을 타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칭찬해주던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날아드는 WFH 메시지가 생소하고, 또 가끔은 황당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게 사실이다.

어느날 한 동료로부터 ‘애가 몸이 아파서 WFH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순간 애가 아프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가 과연 내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그것도 아빠가) ‘애가 아프니 재택근무 하겠습니다’라고 이메일 하나 덜렁 보낸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해봤다. 본인이 아파도 출근해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아이가 아프다며 재택근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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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차이가 날까. 


우선, 인프라의 차이다. 미국의 많은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회의는 콘퍼런스콜로 참여하면 된다. 이메일이나 회사 시스템으로 언제 어디서나 동료들과 함께 편리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인프라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둘째 이유이자 충분조건은 ‘자율과 책임’의 기업문화다. 직원을 믿고 자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기본이다. 성과와 책임의 문화도 함께다. 어디서 일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잘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사고방식. 다시 말하면, WFH하면서 일을 잘하면 그 누구도 출근을 안 했다고 뭐라 해서는 안 되고, 반대로 아무리 출근을 열심히 해 얼굴도장을 찍어도 일에서 성과를 못내면 알아주지 않는 문화여야 한다는 뜻이다. 

덧붙이자면 이런 자율과 책임의 기업문화에는 꼼꼼한 기록문화와 투명한 정보공유가 전제돼 있다. 필자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근무시간에 병원을 가야 한다면 당연히 다녀올 수 있었다. OOTO를 아웃룩 캘린더에 공유만 안 했을 뿐이지 그런 유연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부장님만 아는 사실이다. 다른 팀과는 공유되지 않으며 또 그런 병원 방문의 사실은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고 곧 잊혀질 것이다.

OOTO나 WFH을 예로 들면서 미국의 기업문화가 훨씬 더 유연하며 융통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직원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기록되고 있다는 점을 동시에 봐야 한다. 무엇을 하든 자율적으로 하되 그 모든 일정은 기록되고, 또 공유된다. 

이런 극단적인 투명성이 전제돼야 재택근무와 유연한 근무는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직원들은 재택근무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정을 완전히 공개하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 해이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기업은 결국 재택근무를 폐지 또는 축소하는 형태로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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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가 늘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에게 외국의 재택근무 사례는 늘 꿈과 같은 이야기다. 재택근무는 일과 삶 사이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유용한 제도다. 그리고 직원이 행복해야 기업도 잘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한국의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시도하다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술적 투자는 물론이고 기업문화적 관점에서도 갖춰야 할 부분들이 많다는 걸 인식하고 제대로 도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더 이상 아픈 아이가 어린이집에 맡겨지고, 엄마 아빠는 출근해서 퇴근시간만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한국 사회의 흔하디 흔한 일상이 사라졌으면 한다. 아이가 아플 때 WFH 공지 하나면 충분한, 미국 사회의 보이지 않게 흐르는 ‘신뢰’가 부러울 따름이다.


비즈니스인사이트 최한나
businessinsigh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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